전설과 연혁

대한불교조계종 제 5교구 본사인 법주사의 말사이다. 1992년 국립청주박물관이 옛 절터인 이곳 용화사 부근에서 발굴한 청동반자의 명문 판독결과 고려 후기에 큰 사찰이었던 사뇌사(思惱寺)라 밝혀짐으로써 용화사가 무구한 역사의 고찰이라는 것이 확인되어졌다. 사뇌사는 신라 말이나 고려시대 초에 창건된 대찰로 일부 학계에서는 몽고의 4차 침입 때 유물들이 매몰한 것으로 추정한다. 일설에는 삼국통일의 의지가 태동하던 선덕여왕대에 미륵불 7본존을 중심으로 70칸 규모의 사찰로 창건되어

신라 화랑들의 심신 단련과 군사들의 충성을 맹세하는 도량으로 활용되기도 하다가 이후 여러 차례의 병화(兵火)로 법당은 소실되었으며, 미륵불은 대홍수로 무심천에 묻혔다고 전해오기도 한다.

그러나 용화사의 사적(1933년 10월에 기록한 법당 상량문)에 의하면 조선 광무 6년(1902)3월 14일 고종의 후궁인 엄비 (嚴妃)의 명에 의해 청주 지주 이희복이 창건했다. 이에 관련한 전설을 소개하자면, 엄비는 1901년 어느 날 낮잠을 자고 있었는데 천지가 요동하는 소리에 놀라 밖으로 나가자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피어오르면서 일곱 선녀의 부축을 받고 나타난 미륵은 ‘우리가 어려운 처지에 놓여있으니 큰절을 지어 우리를 구해달라’고 간청하며, 이와 같은 사정을 청주군 지주에게 물어보라 말한 뒤 서쪽 하늘로 사라졌다.

이에 엄비는 고종에게 고하여 청주군 지주에게 어명을 내리고 조사하도록 하였다.
같은 시각 청주군 지주 이희복도 같은 내용의 꿈을 꾸었다.
3일 후 어명을 받은 이희복은 자신의 꿈이 엄비의 꿈과 일치한 것을 알고 필시 무슨 사연이 있으리라 생각하여 사람들을 서쪽으로 보냈다. 과연 그 곳에 가니 큰 늪이 있었으며, 이희복은 늪의 물을 퍼내고 보니 그 곳에 칠존의 석불이 묻혀있었다.
그 일이 어명과 부합되는 일이라 상고하니 엄비는 너무나 신기하고 기뻐서 내탕금을 내려 그곳을 정비, 사찰을 짓고, 일곱 부처를 안치토록 했다.
이에 이희복은 상당산성 안에 있던 보국사(輔國寺)를 이곳으로 옮기고 용화사(龍華寺)라 했다.
용화사라고 한 것은 미륵불이 용화수(龍華樹) 아래에서 성불하고 설법도생하였기 때문이라고 한다.
용화사의 창건 당시 사찰규모는 미륵전 15칸, 산신각 칠성각 3칸, 설교전 15칸, 행랑 4칸의 비교적 큰 규모였다.
이후 1935년 화재로 불타버리자 김원근(金元根)거사가 당시 충북도청부속건물인 선화당(宣化堂)을 매입, 이곳에 옮겨 법당 등으로 사용케 하였다.

6·25전쟁때 법당이 완전히 소실되는 바람에 칠존 석불도 노천에 방치되었다가 1972년 비구니 오동림(吳東林)과 신도들이 콘크리트 법당인 미륵보전을 새로 지어 안치했다.
1976년 12월 26일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4호로 지정된 후 조각의 우수성과 중요성을 인정받아 1989년 4월10일 보물 제985호로 승격된 이들 석불상군은 월탄스님이 목조건물인 용화보전 불사를 1995년 준공해 이곳에 봉안해 오고 있으며 2007년5월 용화보전 보현보살 석불을 봉안 2007년 8월부터 극락전 신축 불사중에 있다.

청주의 중심도량인 용화사는 수행과 포교의 구심점으로 신행단체를 재조직 개편하여 활성화하고 청주시민의 참여와 지역발전에 일익을 담당하는 데 노력하고 있으며, 도내 사찰 중 가장 먼저 충북불교대학을 개설, 동문회활성화 그 외 많은 산하단체를 설립함으로서 많은 시민들이 함께 참여할 수 있는 프로그램 확대와 더불어 도심속의 열린 도량으로 도약하고 있다.